← 살아온 이야기

2026-04-02

가장 젊은 산조

이정윤 · 대금 연주자

산조를 불다 보면 가끔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. 제가 부는 이 가락은 저보다 훨씬 오래 살았습니다. 이 소리를 만들고 다듬어온 분들의 세월을 전부 합치면 아득한 시간이 됩니다. 그 긴 시간이 지금 제 짧은 호흡을 통과해서 나옵니다. 오늘은 그 낙차에 대해 써보려고 합니다.

젊은 사람이 산조를 불면 흔히 듣는 말이 있습니다. 소리는 좋은데 아직 깊이가 없다는 말입니다. 처음에는 그 말이 아팠습니다. 깊이라는 게 나이를 먹어야만 생기는 것이라면, 저는 그냥 시간을 기다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이니까요. 억울했습니다.

깊이는 나이의 다른 말일까

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. 깊이가 꼭 겪은 세월의 양은 아닐 수도 있다고요.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보다, 자기가 겪은 것을 얼마나 정직하게 소리에 담느냐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. 스무 해 남짓한 삶에도 상실이 있고, 그리움이 있고, 말로 못 한 마음들이 있습니다. 저는 저의 슬픔밖에 모르지만, 그것이라도 거짓 없이 불면 된다고 이제는 생각합니다.

흉내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습니다. 명인들의 음원을 듣고 그 농음과 시김새를 그대로 따라 하면, 녹음해서 들어봤을 때 비슷하기는 합니다. 그런데 어딘가 비어 있습니다. 남의 한숨을 흉내 낸 한숨 같다고 할까요. 옛 소리를 배우는 것과 옛 소리인 척하는 것은 다르다는 걸, 실패를 거듭하며 배우고 있습니다.

그래서 저는 요즘 이렇게 연습합니다. 먼저 스승과 명인의 길을 최대한 그대로 따라갑니다. 거기에 제 해석을 얹는 것은 그다음 일입니다. 순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. 뿌리 없이 개성부터 찾으면 그것은 새로움이 아니라 그냥 미숙함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.

젊음이 산조에 보탤 수 있는 것

그렇다면 젊은 연주자는 산조에 아무것도 보탤 수 없을까요.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. 젊음에는 젊음만의 소리가 있습니다. 아직 굳지 않은 호흡, 겁 없이 밀어붙이는 힘, 이 음악을 처음 만난 사람의 생생한 놀라움 같은 것들입니다. 노련함이 줄 수 없는 것을 서투름이 줄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.

산조는 박물관의 유리장 안에 있는 음악이 아닙니다. 대대로 그 시대의 연주자들이 자기 숨을 불어넣으며 살려온 음악입니다.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의 몫은 지금 젊은 우리에게 있는 셈입니다. 제가 부는 산조는 아직 설익었지만, 적어도 살아 있는 사람의 오늘의 숨으로 불고 있습니다.

언젠가 제 소리에도 세월이 쌓일 것입니다. 그때의 제가 지금의 녹음을 들으면 아마 부끄러워하겠지요. 그래도 괜찮습니다. 가장 젊은 산조는 가장 미완성인 산조이고, 미완성이라는 것은 아직 자랄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.